이선민 작가 인터뷰 (Click here to read in English)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타인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있는 이선민 사진작가, 외국의 한 온라인 매거진에서 한국의 사진작가로 소개된 그의 사진에 하버프레스는 곧바로 매료되었다. 아마도 그가 담은 사진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작물에는 창작자의 성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상과 소통의 방법으로 사진을 사용하는 작가 이선민. 그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그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성을 지닌 여성으로서 깊게 공감하며 마음과 귀를 열었고, 3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가득 채워 보냈다.
우리는 앞서 여성과 모성의 길을 걸어간 선배에게 궁금한 것이 참 많았고 그는 진솔하고 진심 어린 조언으로 격려해 주었다.
하버프레스에게 흔쾌히 본인의 집이자 작업실인 공간을 열어준 작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by 하버프레스 최상희
작가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한번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성과 모성 또 가족을 주제로 해서 인물 사진 작업을 한 25년 정도 진행해 왔고요. 최근에는 노년 남성 세대나 20대 청년 세대 등 각 세대에 집중한 인물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선민 사진가라고 합니다.
대학원에서 사진을 수학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때가 저는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요. 대학교 4학년 때 사범대에 다니고 있어서 교생 실습을 나갔어요. 학교 환경을 처음 현실적으로 접하면서 제가 평생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는 게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업으로서 이런 환경을 계속 가지고 사는 것이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뭘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사진을 내 매체로 선택을 하기로 결정을 했죠.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놓고 싶었고 그걸 예술의 언어를 사용해서 잘 소통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이번 동강국제사진제에서 99년 진행한 작업을 전시하게 된 감상이 특별하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감상을 조금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5년 전쯤 99년도부터 2013년까지 했던 6개 시리즈 작업을 묶어서 책을 출판했어요. 저희 아이가 9개월 때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시기까지 다 담겨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책을 만들었는데요. 이번 동강 전시는 그보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제가 20대 청년들에 대한 작업들을 더 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1999년부터 현재까지의 작업들이 같은 전시장 공간 안에서 보이고 그걸 재구성을 하면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작업이 한 바퀴 쭉 돌아와서 다시 돌아오는 느낌도 있고, 어쩌면 이렇게 일직선상에서 흘러간다는 느낌도 있었고,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소멸됐다가 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제 작업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 것 같아요.
처음 수상 사실을 아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글쎄요.(웃음) 사실은 별로 기대를 안 하고 있었어요.
그날이 저희 아들 군대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래서 약간 마음이 허전한 상황이었죠. 작업이라는 게 작가한테 좀 잊힌 사진들도 있잖아요. 바쁘고 새로운 작업을 하고 그러다 보면 잊기도 하는데 이렇게 외부적으로 환기를 해주고 기억해 준다는 게 참 좋은 직업이고 감사하다 싶었어요. 기뻤죠.
작가님이 본인에 대해 설명하실 때 한 가지를 끊임없이 연금하는 예술가라고 표현을 하신 게 인상 깊었는데요,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연금술사라는 의미는 한 가지를 오래 해서 굉장히 잘하게 된, 그래서 순전한 무언가를 얻어낸,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요. 저는 저희 아버지 시대가 그랬다고 생각을 했어요. 되게 오랫동안 한 가지를 하시잖아요. 투잡 같은 것도 없었을 때고요. 저희 아버지도 그랬었고 저도 그렇게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성품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재능도 없고요.
또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길러내는 과정들에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적인 부분들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그러지는 않더라도 당연시되고 그렇잖아요. 그래도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무척 애를 썼던 것 같아요. 힘들었고요. 그래서 작업하는 것도 그렇지만 모성을 가진 여성으로 살아내는 것도 저한테는 연금술사처럼 수행하는 일상이었어요. 작가로서도 그렇지만 일상적인 부분에서도요.
처음에 인터뷰를 시작하거나 말을 걸 때는 어떤 장치로 사용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보통 노년 세대나 중장년 세대들은 ‘이거 찍어가지고 뭐 할 건데. 아프리카에 팔아먹을 거야?’ 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시거든요. 근데 젊은 친구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쁘지 않죠.’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저를 신뢰하더라고요. 물론 사진 준다고는 하죠.(웃음)
로컬 스티치라는 곳에 정주를 하면서 작업할 때도 제가 오히려 힘에 부쳤다고 할까요.
젊은 분들의 에너지에요?
네 에너지와 열정과 관심에요.
그래서 이렇게 흔쾌히 그분들이 집을 열어주시고 그러셨나 봐요. 좀 놀랐거든요.
3개월 정도를 매일 본다고 생각을 하면요. 어떤 사람과 깊이 대화를 안 하더라도 계속 관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기회가 돼서 이야기하게 됐을 땐, 어떤 쌓인 신뢰가 있는 거예요. 서로 이야기는 안 해봤어도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 같아요. 그리고 처음부터 방을 찍은 건 아니에요.
방을 찍을 생각은 거의 없었죠. 처음에는 재미있는 을지로의 공간들 또는 라운지, 키친 같은 곳에서 촬영을 했는데 너무 소품 오브제들을 많이 가지고 오니까 촬영할 때도 제가 도리어 궁금해지는 거에요. ‘뭐가 또 있어요?’ , ‘그럼 방에 한번 가보실래요?’, ‘가봅시다.’ 그래서 갔더니 이렇게 돼 있는 거죠.
그날 이후 방을 인물과 함께 찍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인물을 보면서 다 못 봤던 부분을 방을 가보면 알겠더라고요.
작가님 말씀하시는 거 듣다 보니까 연대한다는 키워드가 작가님 작업에 되게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기도 하네요. 또 연대했다는 증거로 사진이 나오는 것 같은 생각도 주는 것 같고요. 작가님이 사진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제가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고 했잖아요. 그런 게 뭔지 잘 규정은 안 되지만 제 안에 어떠한 갈등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사진을 통해서 질문해 보고 싶었고, 그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이 됐는데 최근에 와서도 그런 열정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두세 개의 궁금증이 있었다면, 지금은 더 많아지거나 깊이 있게 얘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어요.
결론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제가 계속해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사진작가로서 작가님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결혼 전에 했던 작업은 메이킹 포토였어요.
무대를 만들고, 배우를 섭외하고, 무대그림도 그리고 여러 친구들하고 협력해서 에너지를 크게 쓰면서 작업을 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잖아요.
그러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고, 그게 이 책의 첫 표지 작업이에요. 여자의 집 첫 사진이거든요. 셀프 포트레이트에요, 저의 9개월 된 딸하고 찍었죠.
그런데 어떤 인간의 삶이 거기에 멈춰있지는 않잖아요. 아이도 성장을 하고 저도 성장일지 노화일지 모르는 과정들을 거쳐가고. 그게 결국은 생로병사고 또 희로애락이고요. 이런 것들이 느껴질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20대 청년들에 대한 작업을 하지만 결국은 넓어져서 수평적일 수 있는 그런 작업으로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작가님도 여성과 모성을 지닌 개인으로서 충돌하는 지점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어떻게 소화해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결혼을 하고 양육자가 된 다음에, 여성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문제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 여자의 집 I은 15점, 여자의 집 II도 15점인데요. 그 말은 제가 15번씩 촬영을 나갔다는 거예요.(웃음) 정말 시간이 없었어요.
대부분 일요일에 가서 잠깐 찍고 온 거예요. 남편이 아이들을 봐주고 있고, 저는 나가서 촬영하고 오고요. 집에 오면 필름을 이렇게 쌓아놨다가 잊어먹을 때도 있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도 현상하러 못 가는 거죠.
그런데 결국 우리에게 책임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엄마로서 저는 책임이 있는 일을 잘 해 냈어야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작업을 시작을 했는데 그런 것을 다 지우고 살아간다는 건 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요. 그래서 두 가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아요.
사실 두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얘기를 하시지만 더 많아도 된다고 생각을 해요.
시간이 되게 길거든요. 지금 맞닥뜨린 육아에서 오는 기쁨도 있잖아요. 아이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들이요. 또 일의 즐거움도 있을 테고, 그밖에 어떤 다른 게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 경우엔 좀 이타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10년 전 정도부터 문화 예술 교육 한 게 있어요. 소수자 그룹하고 이주해 온 청년들, 청소년, 실버세대, 자립준비 청년들과 같은 대상과 작업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환기하게 되는 거죠.
우리 사회가 너무 나만 보고 살잖아요. 또 특히나 아티스트들의 특징인데 내 감정 내 생각들 이런 것에 너무 집중하니까 거기에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쓸 때가 있거든요.
등산이라고 치면 그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어떤 풍경들이나 장소들에 좀 편안하게, 또 재미있게 연대를 해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겁내지 말고요, 그런 걸 겁내는 사람도 요즘 많은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요. 오늘의 저녁 메뉴는 무엇인가요?
저희는 되게 소박하게 먹어요. 집에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잘 먹고 야채 좀 많이 먹으려고 노력하고요. 오늘은 아마도 샐러드, 김밥 이런 거 먹지 않을까요? 김밥을 위대한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웃음)
이선민 작가의 자화상
“결론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제가 계속해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타인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있는 이선민 사진작가, 외국의 한 온라인 매거진에서 한국의 사진작가로 소개된 그의 사진에 하버프레스는 곧바로 매료되었다. 아마도 그가 담은 사진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작물에는 창작자의 성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상과 소통의 방법으로 사진을 사용하는 작가 이선민. 그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그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성을 지닌 여성으로서 깊게 공감하며 마음과 귀를 열었고, 3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가득 채워 보냈다.
우리는 앞서 여성과 모성의 길을 걸어간 선배에게 궁금한 것이 참 많았고 그는 진솔하고 진심 어린 조언으로 격려해 주었다.
하버프레스에게 흔쾌히 본인의 집이자 작업실인 공간을 열어준 작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by 하버프레스 최상희
작가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한번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성과 모성 또 가족을 주제로 해서 인물 사진 작업을 한 25년 정도 진행해 왔고요. 최근에는 노년 남성 세대나 20대 청년 세대 등 각 세대에 집중한 인물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선민 사진가라고 합니다.





대학원에서 사진을 수학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때가 저는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요. 대학교 4학년 때 사범대에 다니고 있어서 교생 실습을 나갔어요. 학교 환경을 처음 현실적으로 접하면서 제가 평생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는 게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업으로서 이런 환경을 계속 가지고 사는 것이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뭘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사진을 내 매체로 선택을 하기로 결정을 했죠.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놓고 싶었고 그걸 예술의 언어를 사용해서 잘 소통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이번 동강국제사진제에서 99년 진행한 작업을 전시하게 된 감상이 특별하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감상을 조금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5년 전쯤 99년도부터 2013년까지 했던 6개 시리즈 작업을 묶어서 책을 출판했어요. 저희 아이가 9개월 때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시기까지 다 담겨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책을 만들었는데요. 이번 동강 전시는 그보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제가 20대 청년들에 대한 작업들을 더 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1999년부터 현재까지의 작업들이 같은 전시장 공간 안에서 보이고 그걸 재구성을 하면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작업이 한 바퀴 쭉 돌아와서 다시 돌아오는 느낌도 있고, 어쩌면 이렇게 일직선상에서 흘러간다는 느낌도 있었고,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소멸됐다가 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제 작업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 것 같아요.


처음 수상 사실을 아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글쎄요.(웃음) 사실은 별로 기대를 안 하고 있었어요.
그날이 저희 아들 군대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래서 약간 마음이 허전한 상황이었죠. 작업이라는 게 작가한테 좀 잊힌 사진들도 있잖아요. 바쁘고 새로운 작업을 하고 그러다 보면 잊기도 하는데 이렇게 외부적으로 환기를 해주고 기억해 준다는 게 참 좋은 직업이고 감사하다 싶었어요. 기뻤죠.
작가님이 본인에 대해 설명하실 때 한 가지를 끊임없이 연금하는 예술가라고 표현을 하신 게 인상 깊었는데요,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연금술사라는 의미는 한 가지를 오래 해서 굉장히 잘하게 된, 그래서 순전한 무언가를 얻어낸,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요. 저는 저희 아버지 시대가 그랬다고 생각을 했어요. 되게 오랫동안 한 가지를 하시잖아요. 투잡 같은 것도 없었을 때고요. 저희 아버지도 그랬었고 저도 그렇게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성품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재능도 없고요.
또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길러내는 과정들에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적인 부분들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그러지는 않더라도 당연시되고 그렇잖아요. 그래도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무척 애를 썼던 것 같아요. 힘들었고요. 그래서 작업하는 것도 그렇지만 모성을 가진 여성으로 살아내는 것도 저한테는 연금술사처럼 수행하는 일상이었어요. 작가로서도 그렇지만 일상적인 부분에서도요.




처음에 인터뷰를 시작하거나 말을 걸 때는 어떤 장치로 사용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보통 노년 세대나 중장년 세대들은 ‘이거 찍어가지고 뭐 할 건데. 아프리카에 팔아먹을 거야?’ 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시거든요. 근데 젊은 친구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쁘지 않죠.’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저를 신뢰하더라고요. 물론 사진 준다고는 하죠.(웃음)
로컬 스티치라는 곳에 정주를 하면서 작업할 때도 제가 오히려 힘에 부쳤다고 할까요.
젊은 분들의 에너지에요?
네 에너지와 열정과 관심에요.
그래서 이렇게 흔쾌히 그분들이 집을 열어주시고 그러셨나 봐요. 좀 놀랐거든요.
3개월 정도를 매일 본다고 생각을 하면요. 어떤 사람과 깊이 대화를 안 하더라도 계속 관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기회가 돼서 이야기하게 됐을 땐, 어떤 쌓인 신뢰가 있는 거예요. 서로 이야기는 안 해봤어도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 같아요. 그리고 처음부터 방을 찍은 건 아니에요.
방을 찍을 생각은 거의 없었죠. 처음에는 재미있는 을지로의 공간들 또는 라운지, 키친 같은 곳에서 촬영을 했는데 너무 소품 오브제들을 많이 가지고 오니까 촬영할 때도 제가 도리어 궁금해지는 거에요. ‘뭐가 또 있어요?’ , ‘그럼 방에 한번 가보실래요?’, ‘가봅시다.’ 그래서 갔더니 이렇게 돼 있는 거죠.
그날 이후 방을 인물과 함께 찍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인물을 보면서 다 못 봤던 부분을 방을 가보면 알겠더라고요.



작가님 말씀하시는 거 듣다 보니까 연대한다는 키워드가 작가님 작업에 되게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기도 하네요. 또 연대했다는 증거로 사진이 나오는 것 같은 생각도 주는 것 같고요. 작가님이 사진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제가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고 했잖아요. 그런 게 뭔지 잘 규정은 안 되지만 제 안에 어떠한 갈등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사진을 통해서 질문해 보고 싶었고, 그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이 됐는데 최근에 와서도 그런 열정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두세 개의 궁금증이 있었다면, 지금은 더 많아지거나 깊이 있게 얘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어요.
결론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제가 계속해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사진작가로서 작가님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결혼 전에 했던 작업은 메이킹 포토였어요.
무대를 만들고, 배우를 섭외하고, 무대그림도 그리고 여러 친구들하고 협력해서 에너지를 크게 쓰면서 작업을 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잖아요.
그러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고, 그게 이 책의 첫 표지 작업이에요. 여자의 집 첫 사진이거든요. 셀프 포트레이트에요, 저의 9개월 된 딸하고 찍었죠.
그런데 어떤 인간의 삶이 거기에 멈춰있지는 않잖아요. 아이도 성장을 하고 저도 성장일지 노화일지 모르는 과정들을 거쳐가고. 그게 결국은 생로병사고 또 희로애락이고요. 이런 것들이 느껴질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20대 청년들에 대한 작업을 하지만 결국은 넓어져서 수평적일 수 있는 그런 작업으로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작가님도 여성과 모성을 지닌 개인으로서 충돌하는 지점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어떻게 소화해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결혼을 하고 양육자가 된 다음에, 여성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문제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 여자의 집 I은 15점, 여자의 집 II도 15점인데요. 그 말은 제가 15번씩 촬영을 나갔다는 거예요.(웃음) 정말 시간이 없었어요.
대부분 일요일에 가서 잠깐 찍고 온 거예요. 남편이 아이들을 봐주고 있고, 저는 나가서 촬영하고 오고요. 집에 오면 필름을 이렇게 쌓아놨다가 잊어먹을 때도 있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도 현상하러 못 가는 거죠.
그런데 결국 우리에게 책임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엄마로서 저는 책임이 있는 일을 잘 해 냈어야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작업을 시작을 했는데 그런 것을 다 지우고 살아간다는 건 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요. 그래서 두 가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아요.
사실 두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얘기를 하시지만 더 많아도 된다고 생각을 해요.
시간이 되게 길거든요. 지금 맞닥뜨린 육아에서 오는 기쁨도 있잖아요. 아이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들이요. 또 일의 즐거움도 있을 테고, 그밖에 어떤 다른 게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 경우엔 좀 이타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10년 전 정도부터 문화 예술 교육 한 게 있어요. 소수자 그룹하고 이주해 온 청년들, 청소년, 실버세대, 자립준비 청년들과 같은 대상과 작업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환기하게 되는 거죠.
우리 사회가 너무 나만 보고 살잖아요. 또 특히나 아티스트들의 특징인데 내 감정 내 생각들 이런 것에 너무 집중하니까 거기에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쓸 때가 있거든요.
등산이라고 치면 그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어떤 풍경들이나 장소들에 좀 편안하게, 또 재미있게 연대를 해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겁내지 말고요, 그런 걸 겁내는 사람도 요즘 많은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요. 오늘의 저녁 메뉴는 무엇인가요?
저희는 되게 소박하게 먹어요. 집에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잘 먹고 야채 좀 많이 먹으려고 노력하고요. 오늘은 아마도 샐러드, 김밥 이런 거 먹지 않을까요? 김밥을 위대한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웃음)